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앨라배마 크림슨 타이드 (문단 편집) === 역사 === 1892년 고교 시절 미식축구를 배우고 입학한 한 학생이 팀을 꾸리며 창단되었다. 초기에는 미래 하원 의장, 주지사같은 사람들이 선수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실력은 그저 그랬다고. 그러나 1906년 압도적인 열세의 [[오번 대학교|어번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기적적으로 대승을 거두며 [[크림슨 타이드]]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3년 월러스 웨이드라는 감독이 오면서 성공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1925년 로즈 볼에서 [[워싱턴 허스키스]]를 꺾고 무패 시즌으로 동교 첫 우승을 이뤄냈으며 1926년 2년 연속 우승과 1930년 우승을 거두며 배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웨이드가 떠난 다음 해인 1931년에는 프랭크 토마스라는 또다른 레전드 감독이 로즈 볼, 슈가 볼, 코튼 볼에서 모두 4승, 2회 추가 내셔널 챔피언쉽을 따냈다. 또한 이 시기 해리 길머 등 [[대학 풋볼]] 명예의 전당에 오른 선수들이 나왔으며 훗날 감독으로 돌아오게 될 [[폴 브라이언트]]도 선수로 뛰었었다. 현 소속 컨퍼런스인 [[SEC]]에도 초대 멤버로 1932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다. 1940-50년대에는 해롤드 드류라는 감독 시기에는 각종 볼 게임 승리와 역대 최대 아이언 볼 기록인 55-0 승리를 기록했다. 드류의 후임 윗워스 때는 침체기를 맞았지만 [[바트 스타]]라는 스타 플레이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동교 졸업 후 다른 학교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고 돌아온 최고의 레전드 [[폴 브라이언트]]의 시대가 시작된다. 브라이언트는 부임해오자마자 팀을 변신시켰는데, [[조 네이머스]]라는 동교 역사상 최고의 [[쿼터백]]을 앞세워 1961년부터 1966년까지 60승 1무 5패, 4회 컨퍼런스 타이틀, 3회 내셔널 챔피언쉽 승리라는 기록을 남겼다. 1970년대에도 꾸준히 팀을 전국구 강팀으로 유지시키며 103승 1무 16패, 8회 컨퍼런스 타이틀, 3회 내셔널 챔피언쉽 승리를 거두며 배마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달렸다. 특히 이 시기 브라이언트는 배마 미식축구팀 뿐만 아니라 학교의 역사 자체에 지대한 공로를 기여했는데, 바로 1970년 첫 경기, 당시 흑인 학생 입학을 거부하던 학교에게 우수한 실력을 갖춘 학생들을 인종에 구애받지 말고 받자는 본인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당시 자유롭게 팀을 꾸려 최고의 전력을 갖추고 있던 [[USC 트로전스]]와 경기를 잡아 그들의 우월한 실력을 학교 측에 보인 것이었다. 결국 학교는 브라이언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물론 [[JFK]]의 연방 공권력 투입으로 흑인 학생 입학이 이뤄진 점이 더 크다.] 70년대 흑백 선수들로 구성된 배마팀은 1978-79년 [[대학 풋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조 중 하나로 거듭나며 연속 내셔널 챔피언쉽 우승을 이뤄낸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의 시절에도 끝은 찾아오기 마련. 늘 자신이 배마팀 감독직을 내려놓는 날은 자신이 무덤으로 가는 날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폴 브라이언트]]는 1982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은퇴를 결정하고, 불과 몇 달만에 숨을 거두게 되었다. 그가 남긴 기록은 '''25년간 팀을 이끌며 24회 연속 볼 게임 진출, 12회 승리, 13회 컨퍼런스 우승, 6회 전국 우승, 232승 46패 9무'''로 은퇴 당시 최다승 감독이었으며 현재까지 최다 내셔널 챔피언쉽 우승 감독으로 남고 있다. 또한 [[대학 풋볼]] 시즌 최우수 감독상이 그의 이름을 따서 Paul "Bear" Bryant Award라고 불리게 됐다. 브라이언트 이후 팀은 다시 침체기에 빠진다. 비록 브라이언트 시기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노터데임 대학교]]에 승리를 거두거나, 비 메이저 볼 경기에서 몇 차례 승리하기도 했지만 [[FBS/SEC|SEC]] 타이틀권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진 스탈링스 감독이 오면서 초대 SEC 컨퍼런스 챔피언쉽 시리즈 경기에서 1992년 [[플로리다 게이터스]]를 에서 꺾고, 슈가 볼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 [[마이애미 대학교(플로리다)|마이애미]]에게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이룩한다. 하지만 이후 SEC 타이틀 경기에 게이터스에게 연속으로 만나 연패하게 되고 96년 스탈링스도 은퇴하게 된다. 듀보스 감독이 이끈 1999시즌에는 게이터스를 업셋시키며 다시 SEC 우승을 거두고 오렌지 볼에서 [[미시건 대학교|미시건]]과 맞붙게 된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연장까지 가는 혈투끝에 결국 극적으로 역전패를 당하는데, 당시 맹활약한 상대 쿼터백은 바로 4학년 [[톰 브래디]]였다. 이어진 2000년은 우승 후보로 꼽힐만큼 큰 기대를 받은 시즌이었지만 팀 최악의 흑역사가 되버린다. 우승은 커녕 팀이 슬럼프에 빠지며 디비전 꼴찌를 해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듀보스 감독이 비서와 바람핀것이 들통나버리며 결국 해임당하게 됐다. 하지만 이건 바닥도 아니었으니 듀보스 감독 밑에서 일하던 코치가 리쿠르팅 과정에서 선수와 고교 코치에게 부당 금품 지급이 드러나면서 [[NCAA]]에게 2년간 플레이오프 진출 금지, 3년간 장학금 축소라는 중징계를 얻어맞는 최악의 사건까지 터진 것. 결국 2002시즌 후임 프란치오네가 [[닉 세이반]]의 [[LSU 타이거스|LSU]]를 셧아웃 시키는 등 선전하여 디비전 우승을 거두고도 징계로 SEC 챔피언쉽에 나가지 못하게 되고, 본인도 다른 팀에서 오퍼가 오자 팀에 남을 것처럼 하다가 낼름 날라버렸다. 이어서 전설적 명장 [[돈 슐라]]의 아들이자 동교 [[쿼터백]] 출신인 마이크 슐라가 부임하지만 징계가 풀린 뒤에도 팀은 부진의 늪에서 허덕였으며 최대의 라이벌전 아이언 볼에서도 연패를 달린다. 결국 2006년 아이언 볼 패배와 함께 슐라도 해임을 당한다. 그리고 2007년, [[마이애미 돌핀스]]에서 [[NFL]] 실패를 겪은 전 [[FBS/SEC|SEC]] 감독을 새로 데려오게 된다. 그는 바로 2002년 배마에게 셧아웃 패배 굴욕을 당했지만 이듬해 [[LSU 타이거스|LSU]]의 내셔널 챔피언쉽 승리를 거두었던 [[닉 세이반]]. 그리고 세이반은 마침내 배마팀을 오랜 암흑기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세이반 시대의 역사는 [[앨라배마 크림슨 타이드 풋볼/역대 시즌]] 문서에 기술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